[율곡로] 오타니와 노모, 다른 길 걸었던 '만찢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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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오타니와 노모, 다른 길 걸었던 '만찢남'

빅스포츠 0 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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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야구가 인기 종목인 한·미·일 삼국에서 '가을 야구'로 불리는 포스트 시즌이 일제히 진행 중이다. 한 세기 넘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둘만 꼽자면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 이름을 떠올린다. '빅리그'로 불리는 미국 메이저리그를 평정 중인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 그리고 미국 진출 물꼬를 튼 선구자 노모 히데오(野茂英雄). 두 선수의 업적과 인생 이야기는 우리 같은 범인이 들으면 믿기 힘들 만큼 비현실적이다. 요즘 속어로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남자)이라 부를 만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영웅담을 썼지만, 눈부신 결과를 내기까지 인생행로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두 사람 이야기는 비교하며 들으면 더 큰 울림을 준다. 한 사람은 시작부터 완벽 캐릭터를 거짓말처럼 유지하는 '슈퍼맨'이다. 다른 한 사람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는 이력을 이어가다 역경을 극복하며 정상에 오른 의지의 사나이다. 전자는 현역 오타니, 후자는 은퇴한 노모다. 장르와 내용은 달라도 둘 다 영화나 만화 속 주인공 같다. '마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이도 있지만, 감동 드라마를 좋아하는 관객도 있다.

오타니 쇼헤이
오타니 쇼헤이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오타니는 만화라 해도 너무 뻔해 재미없을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에이스 투수와 중심 타자를 겸하며 위기 때 홈런을 쳐 승리를 이끄는 주인공을 만화로 그린다면 "만화라도 이건 심하네"라고 할 거다. 분업화가 정착된 프로야구에서, 그것도 최고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그는 상식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였다. 프로야구에선 투수 대신 타격만 하는 지명타자가 있어 투수는 타석에 안 선다. 게다가 투구와 타격 둘 중 하나만 전념해도 잘 해내는 건 소수다. 그런데 오타니는 일본에 이어 미국 프로야구에서도 '이도류'(二刀流:투타 겸업)가 가능함을 입증했다. 심지어 할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기록과 역사를 연일 쓰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실성과 자기관리 등이 남달랐다. 고교에 진학해선 '만다라트'라는 계획표까지 만들어 수행자처럼 자신을 통제했다. 8대 목표와 64개 과제로 구성된 만다라트엔 8개 구단 1순위 지명 같은 목표 외에도 인간성, 운 같은 요소도 들어갔다. '운'을 키우려 인사하기, 쓰레기 줍기 같은 과제도 실천할 만큼 비범했다. 그렇게 수련한 고교생은 일본 프로팀이 주목하는 엘리트 유망주가 됐다. 끈질기게 구애한 니혼햄에 투타 겸업 조건으로 입단, 사상 첫 두 자릿수 승리-홈런 달성, 투수 3관왕 등을 이뤘다. 미국에 가서도 "MLB에선 안 될 것"이란 비웃음을 샀던 이도류 실현을 넘어 각종 신기록을 제조 중이다. 사상 첫 15승-30홈런, 최초 10승-40홈런, 최초 50홈런-50도루, 최초 규정 이닝-규정 타석 충족 등 전인미답을 걷고 있다. 올해는 사상 최초 3년 연속 만장일치 최우수선수(MVP)에 도전한다.

외계인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별 슬럼프 없이 엄격한 자기관리로 꾸준히 인간 한계를 깨나가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 여러 최고 엘리트가 함께 도전해도 하기 어려운 일들을 혼자 계속 성취하고 있다. 무엇보다 의미가 큰 건 그가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모조리 깨주고 있다는 부분이다. 서구권에선 동양인 남성에 대한 편견이 있다. 작고 약하고 남성성이 떨어진다고 여긴다. 그런데 오타니는 체구가 서양인보다 우람하고 강인하다. 미국인의 자존심인 야구에서 독보적 능력도 보여준다. 같은 동양인으로서 고마울 뿐이다.

노모 히데오
노모 히데오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반면 노모는 '레전드'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처음부터 엘리트가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했지만, 피나는 노력과 인내로 성공 신화를 썼다. 크지 않은 체격에 성격도 내성적이었고 실력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초·중학교 시절엔 무명이었고, 그래서 고등학교도 지방의 약체로 진학했다. 당시 신체적 강점이 별로 없던 노모는 직구 위력을 높이고자 타자에 등이 보이도록 비틀어 던지는 그만의 독특한 '토네이도' 투구자세를 개발해 체화했다. 그런 노력 끝에 고교 시절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기도 했으나 폼도 이상한 시골 투수를 지명하는 프로 구단은 없었다.

큰 실망과 시련이었지만 노모는 좌절하지 않았다. 사회인 야구팀에 들어가 부단히 노력했고 신무기 포크볼도 장착했다. 아마추어 야구판에서 두각을 보인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국가대표로 나가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이듬해 무려 8개 구단에서 1순위 지명을 받았고,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했다. 노모는 첫해부터 투수 4관왕에 오르며 신인 사상 최초로 최고 투수에 주는 사와무라상을 받았다. 이후 4년 연속 다승 및 탈삼진왕에 오르며 일본을 대표하는 투수로 올라섰다. 불과 몇 년 전 프로팀들이 모두 외면했던 선수가 보인 성취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구단의 푸대접 논란 속에 노모는 은퇴 형식으로 팀을 떠나 1995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약 30년 전 메이저리그로 간 무라카미 마사노리 이후 일본 선수론 두 번째였다. 계약금과 연봉도 많지 않았으니 안온한 환경을 박차고 또 한 번 도전에 나선 것이다. 재미있는 건 지금과 달리 당시 일본 팬과 야구인들은 노모의 도전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실패할 거라고 악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시련을 또 이겨냈다. 데뷔 첫해부터 13승을 올리고 신인왕과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따내며 비난 여론을 보란 듯 잠재웠다. '노모 신드롬'이 미국과 일본을 휩쓸었고, 그는 일본의 자부심이 됐다. 이듬해에도 16승을 거두며 에이스로 부상했고 그다음 해 전반기도 좋았지만,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며 다시 시련과 방랑기에 접어든다. 이후 트레이드, 방출 등으로 몇 개 팀을 전전하던 그는 두 자릿수 승을 따내며 부활했다. 친정팀 다저스는 그를 특급 대우로 다시 불렀고 2년 연속 16승으로 보답받는다.

노모는 메이저리그 통산 123승과 사상 네 번째 양대 리그 노히트노런 등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일본인으로는 메이저리그에서 처음 거둔 탁월한 성과란 점에서 그의 도전 이후 일본 선수들의 미국행에 물꼬가 트였다. 이는 노모에게 개척자이자 선구자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오타니와 스즈키 이치로처럼 이후 그를 능가하는 성과를 보인 선수도 있지만, 노모가 없었다면 그들의 미국행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노모가 먼저 닦아놓은 길을 사사키 카즈히로, 구로다 히로키, 마쓰자카 다이스케, 우에하라 고지, 이와쿠마 히사시, 다르빗슈 유, 야마모토 요시노부 등 수많은 일본 스타가 뒤따라 걸었다.

야구장
야구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가을 야구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새삼스레 오타니와 노모 이야기를 엮어본 건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이어서다. 오타니와 노모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다. 둘은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한계는 없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던져줬다. 오타니는 동양인의 인종적 자존감을 높였다. 인성까지 완벽할 만큼 좋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롤모델로 제시하고 싶다. 다만 개인적으론 오타니가 살짝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니 노모에게 조금 더 마음이 끌린다. 노모는 수많은 장애물을 뚫고 나아간 용감한 도전자였다. 평범한 무명 출신인데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꿈을 현실로 이뤄냈다. 보통 사람 입장에선 마블 영웅물보다 '쇼생크 탈출'이나 '포레스트 검프' 같은 휴먼 드라마가 더 끌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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