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연합뉴스) 유지호 이대호 기자 = 믿었던 에이스가 기대를 뛰어넘는 역투를 펼치고 임무를 마치자 감독은 뚜벅뚜벅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모자챙을 매만지던 감독은 민머리를 그대로 드러내며 마운드에서 투혼을 보여준 투수에게 90도로 꾸벅 인사하고 포옹했다.
체코 야구 역사를 새로 쓴 선수를 향한 최고의 예우였다.
체코는 13일 일본 도쿄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호주와 B조 최종전에서 3-8로 졌다.
이날 호주에 승리하면 1라운드 통과를 노려볼 수 있었던 체코는 6회까지 1-1로 맞서 팽팽한 경기를 펼쳤다.
그 배경에는 에이스 마르틴 슈나이더의 역투가 있었다.
체코가 WBC 유럽 예선을 뚫고 사상 최초로 본선에 진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슈나이더는 팀의 운명이 걸린 경기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호투를 이어갔다.
1회 알렉스 홀에게 내준 1점 홈런이 유일한 피안타일 정도로 힘 있는 타자가 즐비한 호주 타선을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슈나이더는 65개의 투구 수 제한이 있는 상황에서 5⅓이닝 1피안타 1탈삼진 1볼넷 1실점으로 임무를 마쳤다.
슈나이더가 마운드를 내려간 뒤 체코 마운드는 무너지고 말았다.
7회 2점과 8회 3점, 9회 2점을 더 내주고 3-8로 패해 대회를 1승 3패로 마쳤다.
잘 알려진 대로 체코 대표팀 대부분 선수는 생계를 위한 직업이 있다.
한국전 선발 투수였던 루카시 에르콜리는 대학교에서 스포츠 경영학을 전공한 홍보 전문가로 체코 야구협회 홍보 직원이다.
파벨 하딤 감독은 뇌외과 전문의, 슈나이더는 소방관이 본업이다.
이런 선수들이 거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서 싸워 많은 야구팬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하딤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공식 기자회견에서 "슈나이더는 우리 팀 투수진 베테랑 가운데 한 명이다. 투구 수 제한이 없었다면 오늘 경기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 더 던져주길 바랐다"고 말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건 투구 수 제한까지 던지며 최소 실점으로 막아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던 셈이다.
프라하에서 소방관으로 일하는 슈나이더는 자택 뒷마당에 그물을 설치게 공을 던지면서 이번 대회를 준비했다.
'공인구 적응이 덜 됐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한국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일찌감치 공인구를 받아 미국에서 전지훈련까지 소화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좋은 성적을 내려면 환경이나 장소가 중요하지만, 가장 앞서는 건 야구에 대한 열정이다.
일본 도쿄돔에서 대회 기간 '낭만 야구'를 보여준 체코 대표팀은 그들 스스로가 야구를 마음껏 즐겨 이번 대회 진정한 승자로 남았다.
하딤 감독은 기자회견장을 떠나며 "(다음 대회가 열릴) 3년 뒤에 봅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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