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년 3월, 전쟁영웅 유금필이 참소를 입어 곡도, 즉 백령도로 귀양갔어.
전쟁에서 큰 공을 쌓은 유금필에 대한 견제 때문이야. 어쩌면 이순신을 경계한 선조처럼 왕건이 유금필을 견제한 것일 수도 있지, 본인도 태봉의 전쟁영웅이었을 때 궁예를 몰아냈으니 유금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을 수도 있어.
상세한 전후사정은 3편에서 다룰게.
929년 나주를 탈환했던 견훤은 고창전투 이후 고려로 넘어간 분위기를 되돌리려 했어.
그래서 932년 9월, 상귀에게 수군을 거느려 고려 수도, 송악을 공격하게 했고 상귀는 정주, 염주, 백주의 고려 전함 100여 척을 파괴하고 저산도의 군마 300여 필을 약탈했어.
심지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와 송악의 고려 왕궁을 포위공격했어.
왕건은 927년 공산에서의 악몽이 떠올랐지.
이때, 박수경이 하드캐리했고 상귀군은 송악 포위를 풀고 물러나. 왕건이 이번에는 박수경 덕에 죽을 고비를 넘긴거지.
왕건 운 개좋은듯. 유금필, 신숭겸, 김락, 배현경이 돌아가면서 살려주네
하지만 견훤은 또 한번의 공격을 계획했고 바로 다음 달인 932년 10월, 상애를 시켜 수군으로 예성강 인근을 공격하게 했지.
상애는 수군을 이끌고 북진했어. 그러고는 대우도를 불바다로 만들지.
그래서 고려 왕건은 왕만세에게 수군을 주며 상애를 격퇴하게 했어.
하지만 왕만세는 상애에게 패배했고, 불과 한달 전 예성강 전투처럼 백제군을 막지 못할 것만 같았지.
그런데 이때, 유금필이 왕건에게 서신 하나를 보내.
'신은 비록 죄를 짓고 귀양살이하고 있지만 백제가 우리 해변 고을을 침략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가 이미 곡도와 포을도의 장정들을 뽑아서 군대를 편성하고 전함도 수리하여 방어할 수 있게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우려하지 마옵소서'
금필의 서신을 읽은 왕건은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짐의 불찰이다'
라고 울면서 말했어.
유금필은 이렇게 왕건을 안심시킨 후, ㄹㅇ로 의병부대를 조직해 상애의 백제 수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상애군은 백제로 퇴각해.
이렇게 유금필이 또 한번의 송악 공격이 일어나지 않하도록 막아낸거야.
금필의 이러한 승전소식을 접한 왕건은
'경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짐이 매우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이다. 장차 자손들에게까지 상을 주어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겠다'
라며 금필의 귀양형을 풀어주고 금필을 크게 칭찬했어.
왕건의 말대로 금필의 후손 중 죄를 짓고도 오히려 벼슬을 받은 사람들도 있어.
7. 사탄 전투와 자도 전투
견훤은 고창전투 이후 고려로 넘어간 분위기를 가져오기 위해 수군을 이용한 송악 공격을 두차례 실시했어.
그 후,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진을 시작해. 그리고 마침내 927년의 서라벌 침공을 재현하려 하지.
그러자 왕건은 능장, 영주, 열궁, 공희를 파견하고 유금필을 정남대장군에 임명한 후 의성에 배치하여 백제의 동진에 대비해.
견훤은 견신검과 견금강 중 누구를 왕위에 올릴지 고민해. 견훤은 용모가 뛰어나고 기골이 장대하며 병법에 밝은 데에다 많은 전투에서 승전보를 올린 금강을 내심 왕위에 올리고 싶어하지만, 신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했어.
그래서 견훤은 견신검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서라벌을 침공하게 해. 그래서 신검은 933년 5월, 갑사를 이끌고 동진해.
927년의 서라벌 침공이 재현되려 하자 왕건은 금필에게
'짐은 신라가 백제에게 침략 당함을 염려하여 일찍이 능장, 영주, 열궁, 공희를 파견하여 진수하게 하였는데,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성, 아불진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만약 서라벌까지 침범될까 우려된다. 경이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
라며 금필에게 신검을 막으라 명했어.
금필은 시간이 촉박해서 겨우 80기의 제번병만을 뽑아 신검군을 쫓아가.
그러고는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이르러서는 80명의 용사들에게 이같이 말했어.
'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 나는 필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대들이 함께 희생당할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 살 궁리를 강구하라'
이에 80용사가 일제히 답했어.
'우리들이 모두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을 홀로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이후 사탄에서 신검군과 유금필군이 만났는데 유금필군의 대오가 정예로운 것을 보자 신검군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버림 (...)
이렇게 신검을 물리친 후 유금필군이 서라벌에 입성하자 8년 전의 악몽을 똑똑히 기억하던 서라벌 사람들이 성 밖까지 나와 유금필을 눈물로 영접하고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어.
'뜻밖에 오늘 대광을 뵈옵게 되었습니다. 대광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백제군들에게 살육당했을 것입니다'
7일간 서라벌에 머무르던 유금필군은 다시 의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도에서 신검군의 기습공격을 받지만 오히려 신검군을 개박살내고 금달과 환궁 등 고위 지휘관 7명을 생포해버림 (...)
참고로 견신검이 유금필을 기습하기 위해 7일 넘게 기다린 이유는 금강과의 왕위 계승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확실한 군공이 필요한데, 갑사를 이끌고 유금필의 제번병 80기에 개털린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야.
특히 견금강이 그동안 여러 군공을 쌓은 것에 비해 자신은 군공이 거의 전무해서 더 급했을듯.
유금필이 서라벌 구원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었다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하며 유금필에게 감탄했어.
그리고 그가 입궐할 때는 직접 궁전 밖으로 나가 유금필의 손을 잡고는 '그대 같은 공훈은 옛적에도 드문 일이니 내가 이것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잊지 않겠다!' 라며 유금필의 공을 치하해줬어.
이에 유금필은 무덤덤하게
'국난에 임해서는 사사로운 것을 잊어야 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신하의 직분일 따름입니다. 성상께서는 어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라고 답했는데 이는 사실 겸손을 떨며 왕건을 살짝 꼬집는 말이야. 물론 왕건은 못 들은 척 넘어갔고.
8. 운주 전투
934년 9월, 왕건이 직접 자신의 친위대를 이끌고 운주성을 넘어 홍성까지 진군했어. 이에 견훤도 갑사 5천을 이끌고 홍성성주 홍규의 병력과 함께 전장에 나섰지.
견훤의 군세는 왕건의 군세에 앞섰어. 그래서
'양군이 서로 싸우면 양군 모두 온전치 못할 형세이니 병졸들이 살상을 많이 당할까 염려된다. 그러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존하는게 어떠한가?'
라고 저자세로 화친제의를 하며 왕건을 떠봤지.
그러자 왕건은 견훤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일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해.
불과 2년 전, 송악 왕궁이 백제군에게 포위공격 당한 적 있어서 자신감이 없었을듯. 견훤이랑 싸울때마다 대부분 털리기도 했고.
그런데 이때, 우장군 유금필이
'오늘날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임금께서는 신들이 적군을 무찌르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
라며 혼자 제번병을 이끌고 5천 갑사에게 돌진해.
그리고 갑사 3천을 전사시키고 견훤의 책사 종훈을 비롯해서 상달, 최필, 훈겸 등을 사로잡아.
5천 중 3천의 전사자에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견훤의 친위대가 괴멸됐다고 볼 수 있어.
이 전투 이후 견훤은 백제왕으로서 더 이상 전장에 나서지 않아.
또한 927년 운주성주 긍준의 항복으로 얻어낸 운주 북부에 플러스로 운주전투를 통해 홍성성주 홍규, 웅주성주 홍기를 비롯하여 30여 성이 고려에 투항하며 운주와 웅주 전역이 고려 차지가 됐어.
9. 나주탈환작전과 견훤 구출
935년 3월, 견훤일행이 신검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된 후 4월, 왕건이 견훤을 929년 백제에 빼앗겼던 나주탈환작전을 세워.
'나주의 40여 군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복종했다.
일찍이 견서, 권직, 인일 등을 파견하여 안정케 했으나, 백제에게 침략당하여 6년여 간 바닷길이 통하지 않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해 이 곳을 진무하겠는가.'
홍유와 박술희가 지 보내달라고 자원했지만, 왕건은 유금필을 원했어. 그러나 유금필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노년의 몸으로 경상도에서 백제군과 싸우고 있었어. 그래서 왕건은 유금필에게 가라고 못하고 있었고.
강공훤과 황보제공이 눈치있게 '유금필이 적임자입니다' 라며 유금필을 추천해주자 왕건은 또다시 거절했어.
이때 유금필이 직접
'신이 비록 이미 노쇠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라 하자 왕건은 속으로 개이득을 외치며 유금필을 도통대장군에 임명한 후 예성강까지 마중 나갔어.
왕건은 유금필에게 전함 40여 척을 거느려 보내 나주를 탈환해. 그리고 유금필이 돌아올때도 왕건이 마중나갔어.
이때 백제 측에선 구도-구단서 부자가 막으려 출전했었는데 패배했을 뿐 아니라 구단서가 포로로 잡혀.
두달 후 935년 6월, 견훤이 고려에 구원요청하자 유금필과 왕만세를 필두로 향예, 능선, 오담, 충질이 바다 건너 나주를 통해 견훤 일행을 구원해.
왕건은 견훤을 상보라 부르며 극진히 예우했고,송악 왕궁의 남국을 주었으며, 정승에 봉했어.
10. 일리천 전투와 후삼국 통일
935년 11월 신라의 항복을 받아낸 고려 왕건은 백제와 최후의 한타싸움을 준비했어.
그래서 936년 9월, 왕무를 총사령관 삼아 8만7천5백 군대를 이끌고 일리천에서 백제군과 맞붙게 하지.
참고로 기병이 4만7천5백, 보병이 4만이었음
왕무는 군대를 박술희 등이 이끄는 좌군, 홍유 등이 이끄는 우군, 김순식 등이 이끄는 중군에 유금필의 중앙 돌격대와 강공훤의 후군으로 총 오위진으로 나눴어.
유금필은 제번병 9천5백 기를 자신의 부장 관무, 관헌과 함께 이끌었지.
백제 2대 왕 견신검은 6만5천 군대를 이끌고 자신이 중군, 양검이 좌군, 용검이 우군을 이끌게 했어.
드디어 양군이 맞붙었어.
그런데 백제 우군이 곧바로 고려 우군에게 항복했어.
왜냐하면 우군 사령관 박영규는 45년 전 견훤과 함께 거병했었고 견훤의 심복 2인 중 하나였어.
이런 박영규가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견훤을 강제폐위하자 견훤을 따라 고려를 도운거야.
한편 백제 좌군은 고려군 선봉에 있는 견훤을 보자마자 장수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고려에 항복했어.
심지어 효봉은 견신검이 중군을 이끌고 있다고 고자질해.
이를 들은 왕건은 강공훤의 1만5천 후군을 선봉으로 고려 중군에게 백제 중군 공격을 명령해.
심지어 고려에 항복했던 백제 좌군도 백제 중군을 공격하고 결국 3만5천의 백제 중군 중 1만이 죽거나 포로가 돼.
신검은 약 2만의 잔여병력을 데리고 탄현과 황산벌을 넘어 마성에 들어가.
하지만 이미 좆망했다고 판단하여 결국 능환, 영순, 신덕 등 문무관료를 대동하고 성 밖으로 나와 고려에 항복해.
이로써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어.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견신검을 살려뒀다고 하긴 하는데 죽인 것 같음 견양검, 견용검도 죽이고
견신검의 쿠데타 세력 주축인 능환도 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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